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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아트뷰] 우울한 팝아티스트의 초상
 ym  08-07-12 | HIT : 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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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민, 우울한 팝아티스트의 초상

강영민, 그의 이름은 몰라도 여기 저기서 비치는 그의 ‘조는 하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 하트 캐릭터를 사용해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이번 성남아트센터에서 개최한 <팝아트의 세계-Pop N Pop展>에 소개되는 주요 작가 중 하나이다. 가나아트센터 장흥 아뜰리에에서 작업 중인 그를 만났다.

명백히 ‘팝아티스틱’한 작업을 하는 이들 중에서도 남들이 팝아트 작가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팝아트’의 적시성은 인정하고 그 영향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본인의 작업에 반영하지만, ‘팝아트’란 용어에 함의되어 있는 어떤 제한을 자신의 작품에 가하기 싫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팝아트’적이면서도 팝아티스트로 불리기 바라지 않는 아티스트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이제 팝아트가 특유한 조류가 아닌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누구나 참조하는 ‘주류’의 경향이 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하지만 강영민은 팝아트 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아무런 거부감이 없다. 그는 말한다.

“이제 팝아트는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현대예술의 본질을 반영하는 용어가 되었습니다.”

현대예술 전체가 팝아트스럽다는 말이다.

“현재 ‘팝송’이란 건 음악의 한 장르가 아니고 대중음악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죠. ‘다른 장르’인 클래식은 오직 과거의 유산, 그리고 과거의 유산에서 영감을 얻은 에피고넨(epigonen)으로만 남아 있구요. 마찬가지로 현대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파퓰러 아트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팝아트의 정의와는 좀 다르다. 그러고 보니 강영민의 작품세계 역시 우리가 익히 알던 팝아트의 세계와는 다른 것 같다. 로이 리히텐쉬타인,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을 거치면서 변모해온 팝아트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경쾌, 즉 가볍고 명랑하고 보송보송한 것이었다. 하지만 강영민의 세계는 확실히 다르다. 때로 앉아 있고, 때로 누워있는 그의 하트는 어떤 걸 보더라도 어딘가 어둡다. 어딘가 우울하다. 드라이하지 않고 축축하다.

“전 소위 ‘전통적’ 팝아트의 요소들을 거부하고 있거든요. 다시 말해 현란한 원색을 쓰고, 매스 미디어를 차용하고, 주관을 배제하는 팝아트의 특징이 제 작품에는 적용되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가? 본인이 ‘더러운 파스텔톤’이라고 묘사하는 그의 작품들은 확실히 우울하기 그지 없다. 그런데 강영민의 작품들은 왜 이렇게 우울할까?

“그건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로 인간 실존 자체가 우울해요. 두 번째로는, 우리 세대가 우울해요. 그게 제 작품에 반영된 거라고 봅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해할만하다. 인간이 신과 결별한 이후 잃어버린 총체성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것이 철학자들의 고민이었고, 이성이라는 도구를 통해 잃어버린 총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더니즘의 기획이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모더니즘의 기획은 세계대전이라는 참담한 결과와 제국주의, 인종주의 등의 부산물을 낳으면서 이성중심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리하여 스러져가는 모더니즘의 잔해 위에 멜랑콜리의 정서가 자라났고, 20세기의 주조(主調)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강영민의 실존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이라기보다는 현대의 특유한 실존이다.

강영민이 ‘하트(heart)’라는 도안을 마치 자신의 페르소나 (persona)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까?

“네.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저에게 하트는 심장이자, 마음이자, 사랑입니다. 모든 이성적인 것과 대비되는 감성적인 것이죠. 로고스중심주의적이었던 근대를 극복하고 파토스를 회복하자는 뜻이 담겨있기도 합니다.”

다시 작품들을 자세히 보니 하트들이 어쩐지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킨다.

“맞아요. 제가 그리는 하트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여성적이에요. 마초에 반하는 거죠. 그리고 제게 모더니즘이란 곧 마초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때 마초의 이미지는, 뭐랄까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서양 교수 같은 거에요. 이건 한국의 교수도 아니고 꼭 서양 교수여야 해요. 냉소적인 표정으로 자분자분 논리를 전개하면서 듣는 사람의 기를 죽이는 그런 모습이죠. 저는 그런 마초적인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여성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분히 포스트모던한 진술이다. 하여튼 계속 들어보자.

“저의 우울은 세대의 우울이기도 합니다. 70년대생들의 우울이라고 해도 되요. 그런데 우리 세대는 어쩔 수 없이 바로 윗세대인 386들과 비교해서 말할 수밖에 없어요. 이 분들은 굉장히 치열하고 비장합니다. 이들이 막 대학에 들어갔을 때가 군부독재가 한참이던 시절이다 보니 그런 점도 있겠지요. 하여튼 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건 가부와 선악, 호오가 분명하지요. 이는 세상의 선악이 굉장히 분명하던 모더니즘 시대와도 조응하는 정서라고 봐요. 하지만 우리 70년대생들이 보기에는 좀 오바스럽죠. 386들은, 나쁘게 말하면 잘난척하던 큰 형이 아버지와 싸우고 사업한답시고 집안 돈을 다 끌어가지고 나가서 망해서 돌아온 느낌이에요. 386들을 다르게 비유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남근에 대항해서 싸우는 떼남근이랄까, 남근에 저항하긴 하지만 여전히 남근으로 남아 있는 존재인 거죠.”

중요한 지적이다. 386들은 악마와 싸우면서 악마를 닮아갔다. 아니 어쩌면 그의 지적은 해방 후 우리 마초들의 머리 한 구석을 항상 차지하고 있던 ‘살부충동(殺父衝動)’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70년대생’은 오이디푸스적인 살부충동에서 마침내 벗어난 신인류들인가?

“70년대생들은 명쾌하지가 않아요. 386들에게 현실이 이분법적으로 재단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불분명해지는 시기에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거든요. 또한 우리 세대에 들어와서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의식을 지배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우리 세대는 현실(the real)과 초현실(the surreal), 원본과 복제가 잘 구분되지 않아요.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몸으로 체감하는 세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감각적으로 체감하는 세대이죠. 그런데 문제는 시스템이 본질적으로 기존 그대로라는 거죠. 386들이 그렇게 싸워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큰남근 하나’를 ‘떼남근’으로 대체했을 뿐인 거에요. 그러니 우리가 우울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386들에게 ‘거대한 남근’ 트라우마가 있다면, 우리는 ‘트라우마의 일상화’에요.“

답이 나왔다. 강영민의 우울은 시대적/세대적 속박에서 연유한다. 모던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모던에 갇혀 있는 자의 실존, 아버지의 그늘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형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세대의 자의식, 아트시스템에 저항하지만 그 시스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작가의 자괴, 그 모든 것이 강영민을 속박한다. 그래서 강영민은 우울하고, 그래서 그의 하트는 늘 슬프다. 출구는 있는가? 강영민은 아직 모른다. 부딪힐 뿐이다. 더러운 파스텔톤으로 캔버스를 더럽히면서, 좌충우돌한다. 느끼는 대로 가보자. 때로 이 길이 맞는 지 몰라서 두렵고 찜찜하다. 세상이 흐리니 머리도 흐리다. 하지만 갈 데까지 가보자, 부딪히고 또 부딪히며 갈 데까지 가보자.

인터뷰/글: 곽동훈

월간 아트뷰 2008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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